외지인의 관점에서
– 윤원화
사진가는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에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을까.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 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다. 예를 들면 심야에 적외선 카메라로 동물을 촬영하는 것은 ‘보이게 하 는 것’이다. 그렇지만 애초에 빛으로 비출 수 있는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또는 그저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상상할 수밖에 없는 것들도 있다. 이재욱의 작업에서, 역사는 그처럼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사진가의 문제가 된다. 그의 사진 작업은 역사의 현장을 포착하는 저널리즘 사진과도 다르고, 과거에 생산된 역사적 기록들을 현재에 재구성하는 아카이브 기반 작업과도 다르다. 작가는 역사를 선명하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통해 역사의 비가시성이라는 수수께끼와 대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역사가 보이지 않는다’라는 것은 역사의 객관적 속성보다도 작가가 역사에 대해 가지는 어떠한 거리감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1948년 제주 4.3 사건을 다룬 <Red Line>연작(2018)에서 작업의 형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작가는 2017년 제주의 아티스트 거주 프로그램에 1년간 머물면서 처음으로 4.3사건을 하나의 역사적 현실로서 의식하게 되었다. 그 사건은 반세기가 지났지만, 지역 주민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생생하게 존재하며, 제주 곳곳에 그 물리적 흔적을 뚜렷하게 각인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물리적 근접성은 작가에게 4.3 사건에 대한 촉각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을 유발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은 그 사건의 당사자도 관련자도 아닌 외부인이라는 의식을 오히려 첨예하게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제주의 역사적, 지리적 맥락은 작가에게 흔히 한국사를 규정짓는 ‘우리’와 ‘남’의 경계, 이를테면 민족과 외세, 선량한 국민과 억압적인 정부 같은 간편한 이분법에 들어맞지 않는 ‘외지인’이라는 위치를 부여했다. 제주 사람의 입장에서 외지인은 뭍에서 온 사람, 그저 왔다 가는 사람이지만, 그런 외지인으로서 작가는 이 역사가 자신과 전혀 무관한 것만은 아니며 특정 장소나 시간에만 한정된 문제도 아니라고 느꼈다. 어느 한 지역에 정착하지 않은 사람, 말하자면 떠돌이로서, 외지인은 역사를 어떻게 재현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비단 4.3 사건뿐만 아니라 작가가 스스로 당사자성을 주장할 수 없는 역사적 문제를 작업으로 다룰 때 지속적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로 나타났다.
오늘날 외지인은 더 이상 예외 상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규칙한 이주의 노선 속에서 살아가며, 이주를 촉발하고 규제하는 장치들은 지역적인 동시에 지구적인 규모로 존재한다. 이동성과 불 안정성의 증대는 땅에 뿌리 박은 상상적 공동체에 대한 귀속 욕구를 촉발하고 질서의 경계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지만, 특정 지역의 역사와 혈통에 기반하여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노력은 갈 수 록 지속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외지인을 일반적인 위치로 상정하고, 외지인의 입장에서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그로부터 현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생산적일지도 모른다. 20세기 역사를 직접적인 기억이 아니라 미디어로 재현된 낯선 과거로 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지금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후대는 역사를 ‘올바르게’—다시 말해 선대와 동일 하게—보도록 가르쳐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 과거를 해석하고 그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재욱의 작업은 이러한 전환기 속에 위치한다. 그는 직장 업무와 학교 공부로 해외에서 체류하며 오랫동안 외지인의 입장에 있었고, 그동안의 시간적 공백 때문에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한동안 심리적 외지인과 같은 상태에 직면했다. 앞으로도 작업과 전시 때문에 거치를 옮겨 다닐 일이 자주 있을 것이므로, 만성적인 시차 증후군과도 같은 이 불투명한 상태는 쉽사리 가시지 않을 것이다. 이같은 이동 속에서의 삶은 그의 세대에서 특히나 미술을 하는 경우에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다. 몇 주, 몇 달, 또는 몇 년을 단위로 거주지를 옮겨 다니는 사람들에게 사회란 무엇이고, 또 역사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떻게 감각 가능한 형태로 표현되고 공유될 수 있을까. 이재욱이 보이지 않는 것에 이미지를 부여하고자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그렇기 때문에 이재욱의 작업에서 역사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직 그 의미가 확정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재욱의 최근 작업에서 계속해서 희뿌연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빛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 빛깔의 의미는 명확하지도 일관되지도 않다. 먼저 <Red Line>연작에서, 작가는 1948년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민간인 영역과 공산당 게릴라 영역을 구획하는 임의의 경계선이 그어졌던 장소들을 재방문했다. 당시 군대는 해안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의 마을 사람들을 공산당 동조 세력으로 간주하여 일방적으로 학살했다. 작가는 이 비논리적인 경계선을 붉은색 레이저로 표시하여 촬영했다. 어둠 속에서 장노출로 촬영된 컴컴한 사진 속에서 그 선은 산중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마을 앞을 지나가기도 한다. 그것은 전후 맥락을 모르고 보더라도 어딘가 불길한 느낌을 주는 생사의 경계선이다. 그것은 과거에도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고 어쩌면 잘 이해할 수도 없는 자의적인 기준으로 사람들의 움직임과 그 신체적 존재 자체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의 작용을 표현한다.
하지만 <Red Line>의 고요한 이미지가 보여주는 것은 실제로 권력의 작용 아래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의 감각보다도, 자신이 그 자리와 얼마나 멀리 또는 가까이있는지거리를가늠할수없기때문 에 불안해하는 관찰자의 감각에 가깝다. 요컨대 나는 거기에 없었지만, 거기 있을 수도 있었으며, 그 가능성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안정한 거리 감각은 근과거의 사건을 다루는 <Cord-On> 연작(2019)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작가는 2016년 광화문 집회 현장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막기 위해 차 벽을 세웠던 곳을 <Red Line>과 유사한 이미지로 재구성했다. 밤낮없이 인파가 붐비는 광화문 일대를 마치 과거의 역사적 비극을 말없이 증언하는 제주의 밤 풍경처럼 재현할 때, 작가는 정확히 언제 또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그때 거기 없었지만 거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확실히 있었다고 하기도 어려운 상태로, 유령처럼 이미지 위에 어둠과 붉은빛을 드리운다. 그것은 ‘빨갱이 사냥’의 뜨거운 붉은 색보다 오히려 필름을 현상하는 암실의 붉은 조명을 연상시킨다. 어둠을 걷어내지 않고 필름에 기록되지 않는 어슴푸레한 암등 아래 이미지가 홀연히 떠 오르는 것처럼, 작가는 역사의 유령 사진을 제작하고 싶은 것일까?
역사를 직접 대면할 수 없는 피사체로 접근하는 이러한 방식은 1980년 5.18 사건이 벌어졌던 광주 인근의 오래된 나무들을 붉은색 조명으로 촬영한 <Flare 1980> 연작(2019)에서 다시 반복되었다. 여기서 나무들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해독 불가능하게 기록된 일종의 자연적 필름처럼 취급된다. 반면 북한에서 유출된 스마트폰의 사진 데이터를 인화해서 액자로 만든 <Inner safety ll> 연작(2019)에서, 북한 사람들의 이미지는 평범한 일상의 사진으로 자명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입장에서 알 수 없는 것이자 앎이 금지된 것으로서 어떤 비가시성의 어둠 속에 있다. 이 어둠을 시각화하기 위해, 작가는 사진 액자를 검은색으로 코팅해서 일부러 시야각을 좁혔다. 관객 위치에 따라 언뜻 보이다마는 북한 사람들의 모습은 어딘가 비밀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화면의 이편 또는 저편에 있다는 사실은 순전히 우연한 지리적 배치와 임의적 경계설정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것은 이재욱이 지속적으로 천착하는 문제가 결국 역사의 구조적 폭력 이전에 그것이 개개인에게 작용하는 그 난폭한 무작위성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 윤원화
사진가는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에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을까.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 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다. 예를 들면 심야에 적외선 카메라로 동물을 촬영하는 것은 ‘보이게 하 는 것’이다. 그렇지만 애초에 빛으로 비출 수 있는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또는 그저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상상할 수밖에 없는 것들도 있다. 이재욱의 작업에서, 역사는 그처럼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사진가의 문제가 된다. 그의 사진 작업은 역사의 현장을 포착하는 저널리즘 사진과도 다르고, 과거에 생산된 역사적 기록들을 현재에 재구성하는 아카이브 기반 작업과도 다르다. 작가는 역사를 선명하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통해 역사의 비가시성이라는 수수께끼와 대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역사가 보이지 않는다’라는 것은 역사의 객관적 속성보다도 작가가 역사에 대해 가지는 어떠한 거리감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1948년 제주 4.3 사건을 다룬 <Red Line>연작(2018)에서 작업의 형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작가는 2017년 제주의 아티스트 거주 프로그램에 1년간 머물면서 처음으로 4.3사건을 하나의 역사적 현실로서 의식하게 되었다. 그 사건은 반세기가 지났지만, 지역 주민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생생하게 존재하며, 제주 곳곳에 그 물리적 흔적을 뚜렷하게 각인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물리적 근접성은 작가에게 4.3 사건에 대한 촉각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을 유발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은 그 사건의 당사자도 관련자도 아닌 외부인이라는 의식을 오히려 첨예하게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제주의 역사적, 지리적 맥락은 작가에게 흔히 한국사를 규정짓는 ‘우리’와 ‘남’의 경계, 이를테면 민족과 외세, 선량한 국민과 억압적인 정부 같은 간편한 이분법에 들어맞지 않는 ‘외지인’이라는 위치를 부여했다. 제주 사람의 입장에서 외지인은 뭍에서 온 사람, 그저 왔다 가는 사람이지만, 그런 외지인으로서 작가는 이 역사가 자신과 전혀 무관한 것만은 아니며 특정 장소나 시간에만 한정된 문제도 아니라고 느꼈다. 어느 한 지역에 정착하지 않은 사람, 말하자면 떠돌이로서, 외지인은 역사를 어떻게 재현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비단 4.3 사건뿐만 아니라 작가가 스스로 당사자성을 주장할 수 없는 역사적 문제를 작업으로 다룰 때 지속적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로 나타났다.
오늘날 외지인은 더 이상 예외 상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규칙한 이주의 노선 속에서 살아가며, 이주를 촉발하고 규제하는 장치들은 지역적인 동시에 지구적인 규모로 존재한다. 이동성과 불 안정성의 증대는 땅에 뿌리 박은 상상적 공동체에 대한 귀속 욕구를 촉발하고 질서의 경계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지만, 특정 지역의 역사와 혈통에 기반하여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노력은 갈 수 록 지속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외지인을 일반적인 위치로 상정하고, 외지인의 입장에서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그로부터 현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생산적일지도 모른다. 20세기 역사를 직접적인 기억이 아니라 미디어로 재현된 낯선 과거로 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지금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후대는 역사를 ‘올바르게’—다시 말해 선대와 동일 하게—보도록 가르쳐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 과거를 해석하고 그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재욱의 작업은 이러한 전환기 속에 위치한다. 그는 직장 업무와 학교 공부로 해외에서 체류하며 오랫동안 외지인의 입장에 있었고, 그동안의 시간적 공백 때문에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한동안 심리적 외지인과 같은 상태에 직면했다. 앞으로도 작업과 전시 때문에 거치를 옮겨 다닐 일이 자주 있을 것이므로, 만성적인 시차 증후군과도 같은 이 불투명한 상태는 쉽사리 가시지 않을 것이다. 이같은 이동 속에서의 삶은 그의 세대에서 특히나 미술을 하는 경우에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다. 몇 주, 몇 달, 또는 몇 년을 단위로 거주지를 옮겨 다니는 사람들에게 사회란 무엇이고, 또 역사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떻게 감각 가능한 형태로 표현되고 공유될 수 있을까. 이재욱이 보이지 않는 것에 이미지를 부여하고자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그렇기 때문에 이재욱의 작업에서 역사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직 그 의미가 확정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재욱의 최근 작업에서 계속해서 희뿌연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빛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 빛깔의 의미는 명확하지도 일관되지도 않다. 먼저 <Red Line>연작에서, 작가는 1948년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민간인 영역과 공산당 게릴라 영역을 구획하는 임의의 경계선이 그어졌던 장소들을 재방문했다. 당시 군대는 해안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의 마을 사람들을 공산당 동조 세력으로 간주하여 일방적으로 학살했다. 작가는 이 비논리적인 경계선을 붉은색 레이저로 표시하여 촬영했다. 어둠 속에서 장노출로 촬영된 컴컴한 사진 속에서 그 선은 산중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마을 앞을 지나가기도 한다. 그것은 전후 맥락을 모르고 보더라도 어딘가 불길한 느낌을 주는 생사의 경계선이다. 그것은 과거에도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고 어쩌면 잘 이해할 수도 없는 자의적인 기준으로 사람들의 움직임과 그 신체적 존재 자체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의 작용을 표현한다.
하지만 <Red Line>의 고요한 이미지가 보여주는 것은 실제로 권력의 작용 아래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의 감각보다도, 자신이 그 자리와 얼마나 멀리 또는 가까이있는지거리를가늠할수없기때문 에 불안해하는 관찰자의 감각에 가깝다. 요컨대 나는 거기에 없었지만, 거기 있을 수도 있었으며, 그 가능성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안정한 거리 감각은 근과거의 사건을 다루는 <Cord-On> 연작(2019)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작가는 2016년 광화문 집회 현장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막기 위해 차 벽을 세웠던 곳을 <Red Line>과 유사한 이미지로 재구성했다. 밤낮없이 인파가 붐비는 광화문 일대를 마치 과거의 역사적 비극을 말없이 증언하는 제주의 밤 풍경처럼 재현할 때, 작가는 정확히 언제 또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그때 거기 없었지만 거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확실히 있었다고 하기도 어려운 상태로, 유령처럼 이미지 위에 어둠과 붉은빛을 드리운다. 그것은 ‘빨갱이 사냥’의 뜨거운 붉은 색보다 오히려 필름을 현상하는 암실의 붉은 조명을 연상시킨다. 어둠을 걷어내지 않고 필름에 기록되지 않는 어슴푸레한 암등 아래 이미지가 홀연히 떠 오르는 것처럼, 작가는 역사의 유령 사진을 제작하고 싶은 것일까?
역사를 직접 대면할 수 없는 피사체로 접근하는 이러한 방식은 1980년 5.18 사건이 벌어졌던 광주 인근의 오래된 나무들을 붉은색 조명으로 촬영한 <Flare 1980> 연작(2019)에서 다시 반복되었다. 여기서 나무들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해독 불가능하게 기록된 일종의 자연적 필름처럼 취급된다. 반면 북한에서 유출된 스마트폰의 사진 데이터를 인화해서 액자로 만든 <Inner safety ll> 연작(2019)에서, 북한 사람들의 이미지는 평범한 일상의 사진으로 자명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입장에서 알 수 없는 것이자 앎이 금지된 것으로서 어떤 비가시성의 어둠 속에 있다. 이 어둠을 시각화하기 위해, 작가는 사진 액자를 검은색으로 코팅해서 일부러 시야각을 좁혔다. 관객 위치에 따라 언뜻 보이다마는 북한 사람들의 모습은 어딘가 비밀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화면의 이편 또는 저편에 있다는 사실은 순전히 우연한 지리적 배치와 임의적 경계설정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것은 이재욱이 지속적으로 천착하는 문제가 결국 역사의 구조적 폭력 이전에 그것이 개개인에게 작용하는 그 난폭한 무작위성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