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을 극복하는 장면
– 박지수, 보스토크 매거진 편집장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사진가의 일 중 하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 전에 먼저 몸을 움직여야 한다. 사진가는 자신의 몸을 움직여 세상을 바라보고, 이 과정에서 얻은 이미지로 세상에 관한 자신의 해석을 내놓는다. 물론, 이 하나의 의견을 모든 사진가들에게 적용시킬 수는 없다. 개념 미술을 거쳐 디지털에 이르기까지 굳이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직접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도 충분히 사진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는 시대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앞서 말한 의견을 굳이 적용하자면, 전통(전형)적인 사진가에게 해당될 것이다. 이재욱 작가 또한 여기에 속한다. 이 글은 사진가 이재욱이 세상을 해석하기 위해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 동시에 그가 움직여 얻은 장면(사진)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다.

많은 창작자들이 그렇듯이, 이재욱 또한 자신의 일상 반경을 기반해 점차 넓혀 작업의 영역을 확장해나간다. 주요 작업을 살펴보면, 도시 재생 사업에 따른 주거 단지의 변화를 관찰한 <뉴타운 New town>(2014-2015)은 고향 집의 이사가 작업의 계기였다. 국가의 위기가 투영된 개인의 불안을 포착한 <너의 잘못이 아니야 It’s not your fault>(2016-2017)는 유학 생활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레드라인 Red line>(2018)에서 그가 역사적 사건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제주에서의 레지던시를 통해서였다. 이렇듯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동기를 얻어 출발된 작업 들은 각각 전국의 재개발 지역으로(뉴타운), 또 경제 파탄과 테러로 위기를 겪는 터키와 그리스 등 외국 지역으로(너의 잘못이 아니야), 제주 해안에서 5킬로미터 반경의 중산간 지방으로(레드라인) 경로를 확장해 탐색해나간다.

이 탐색 과정에서 중요한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장면이다. 작업의 시간과 공간을 넓고 깊게 확장하는 이유는 결국, 작가가 원하는 장면을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여기서 원하는 장면이란 세상을 바라본 자신의 관찰이나 해석과 동기화 되는 순간이다. 가령 <뉴타운> 중에서 어떤 한 장면은 그런 순간을 온전히 담고 있다. 현재 공사 중인 구역과 20여 년 전에 건축된 노후된 저층 주택들, 그리고 10여 년 전쯤 지어진 복도식 아파트와 신축된 고층 브랜드 아파트 모습이 전경부터 후경까지 레이어가 쌓이듯 차곡차곡 겹쳐진 장면은 시공간이 복잡하게 압축된 도시의 밀도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 밀도야말로 도시 문제의 핵심이며, <뉴타운> 작업이 시각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결정적 장면이 아니었을까. 다른 작업 <너의 잘못이 아니야>에서도 그런 장면이 있다. 도시 야경 이미지가 붙은 건물 앞에서 파란 비닐백을 들고 있는 한 여인을 보여주는 사진(Behind the mythology #2)이다.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뒤섞인 거리에서 여인은, 녹색 신호등 앞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근심 어린 표정으로 땅바닥만 응시한다. 경제 파탄, 테러, 인종차별 등 사회적인 불안이 개인에게 투영된다면 이런 모습을 닮지 않았을까. 그 여인의 얼굴에, 그 얼굴을 바라보는 사진가의 시선에 <너의 잘못이 아니야>의 문제의식이 집약적으로 담긴다.

여기까지 이재욱은 다분히 장면 중심으로 움직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장면을 따라 움직이는 모습은 사진에서의 전형적인 로케이션 방식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원하는 장면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건 사진 매체의 미덕이자 사진가의 능력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이재욱이 관심을 두고 다루는 문제들은 복잡한 맥락과 텍스트를 지니고 있기에, 그저 장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뉴타운>의 경우, 도시의 밀도가 극대화된 스펙터클을 보여줄수록 이미지 자체가 스펙터클이 될 수밖에 없다. 스펙터클한 이미지는 사유를 불러오기보다는 사유를 눈에 보이는 것에 서 멈추게 한다. 바꿔 말하면, 복잡한 논의와 맥락들을 보이는 장면에 국한되어 축소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너의 잘못이 아니야>의 경우에는 사회적 불안이 투영된 한 여인을 보여주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순간의 장면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사진 속의 여인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위로할 만큼의 불행이나 불안을 실제로 겪고 있는지 그 장면 만으로는 알 수 없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파란 비닐백을 든 여인이 신호등 앞에서 멈추기까지 어디에서 왔고, 횡단보도를 건 너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가 장면은 알려줄 수 없다. 어떤 순간의 이전과 이후를 보여줄 수 없는 장면은 그 이전과 이후를 소외시킨다. 한순간 불안해 보였던 여인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줄수록, 그 장면은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여인을 대상화하거나 타자화시킬 일말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이재욱은 <레드라인>에서부터 장면 중심의 로케이션 경로를 이탈하기 시작한다. 이 작업은 제주 4.3 사건 당시, 해안에서 5킬로미터 이상의 중산간 지방을 통행하는 자를 폭도로 간주해 사살하겠다는 포고령의 내용에 기반한다. 여기서 사진 속의 빨간색 레이저는 70년 전 주민들의 생과 사를 가른 죽음의 한계선을 시각화한 것이다. <레드라인>이 이전 작업과 다른 지점은 작가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장면이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전 작업처럼 작가가 원하는 장면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로케이션 경로를 확장해나가는 방식은 <레드라인>에서 통하지 않는다. 이미 과거가 된 역사적 사건을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은 아무리로케이션 경로를 확장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레이저빔으로 만든 ‘레드라인’은 장면으로 보여 줄 수 없는 것을 장면으로 보여주려는 역설을 풀어주는 장치다. 그것은 현실의 장면에서 보여줄 수 없는 4.3 사건의 역사적 텍스트를 시각적으로 변환시켜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면 안에 시각적 텍스트가 개입되는 방식으로 장면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레드라인>은 이재욱 작가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최근 진행 중인 작업 <이너 세이프티 II Inner safety II>는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로케이션이 사실상 불가능한 지역인 북한을 다루고 있다. 제한된 정보를 통해 고착된 북한 이미지의 허상을 다루려는 이 작업에서 작가마저도 제한된 정보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작가는 북한을 직접 방문할 수 없으며, 국내에서 접근 가능한 북한 관련 정보와 이미지는 복잡한 검열과 승인과정을 거쳐 극히 제한적으로만 작품에 활용할 수 있다. 장면을 보여줘야 하는 사진가로서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 사실상 거의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레드라인>에서와 마찬가지로 장면을 극복하는 장면을 풀어야 하는 과제가 이재욱에게 남겨진다. 그는 이번에는 또 어떤 방식으로 장면을 극복할까. 그의 향 후 작업적 행보를 바라보는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